자유롭게 글을 올리시고 이야기하는 공간입니다.
경어체를 사용해 주시길 바라며, 자유로운 만큼 더욱 더 예절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자게의 성격에 맞지 않거나, 광고성글, 타인에게 거부감을 주는 글은 임의 삭제/이동 조치 합니다.
출석부규정;출사코리아 회원은 누구나 작성 가능하며, 05;00 이후에 작성해 주시고 그 이전에 작성한 글은 통보없이 임의삭제 하니 참고 하여 올리시기 바랍니다.
바짝, 렌즈를 당겨 봐
함께 여행을 가고 싶은 친구가 있다.
그런데 사진을 찍는 친구와 시를 쓰는 나는
떠나기 전부터 삐걱거릴 게 뻔하다.
친구도 한때 시인 지망생이었으니까
사진에 문외한인 나를 배려해 줄 거라고 믿었다간 큰 오산이다.
친구는 그런 마음이 없어 보인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친구의 파행에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친구가 사라진다.
주변을 살펴봐도 보이지 않는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다.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다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을 때 불쑥 나타나는 그녀.
이젠 친구의 실종이 놀랍지 않다.
친구가 있는 곳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시상의 미로를 더듬어가듯
그녀의 행적을 추적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빌딩숲 사이,
아직도 이런 곳이 있을까 싶은 곳에서 그녀를 발견한다.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어야
비로소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다.
그녀는 가장 낮은 자세로 뒤처지거나
버려진 풍경들을 렌즈에 담고 있다.
헌 책방 안 먼지와 함께 굳어버린 낱장들,
그늘 한 편을 세 얻어 푸성귀를 파는 할머니,
쪽잠을 자는 노숙자가 벗어놓은 신발 한 짝,
보도블록을 뚫고 나온 노란 민들레.
나도 모르게 아! 하는 탄성을 자아내게 하고
그녀는 미처 캐내지 못한 삶의 편린들을 끌어당기고 있다.
나는 친구를 종군 기자라 부른다.
짧은 머리에 헐렁한 재킷과 청바지
그리고 화장기 없는 민낯.
친구는 영락없는 종군 기자 모습이다.
행동도 다르지 않다.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는
전쟁터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도하는 종군 기자처럼
그녀도 뜨거운 눈물과 웃음이 있는
현장이면 영락없이 나타난다.
내가 나타나면 친구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씩,
웃고는 다시 작업에 열중한다.
지금까지 찾아다녔잖아?
친구의 뒤통수를 향해 쫑알거린다.
그녀가 미안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히려 그녀의 시선이 깊고 넓어질 때마다
동행할 수 있어 뿌듯하다.
그때 그녀가 하는 말이 들려온다.
표정이 죽었네, 죽었어!
어느새 그녀의 카메라 안에 내가 있다.
그래! 시인보다 사진사가 세다.
그녀를 쏘아붙였지만 나는 주눅이 들어 있다.
이쯤 나는 시를 포기했냐고 친구에게 손톱을 세운다.
누구보다 시인이 되기를 원했던 친구의 간절함을 겨냥한 것이다.
기껏 아픈 곳을 찔렀다고 생각했는데
친구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이미 나를 읽은 것이다.
그녀의 렌즈에 밴댕이 소갈머리 같은
내 옹졸함이 사로잡혀 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글 쓰는 모임이었다.
나는 아무에게나 불쑥 카메라를 들이대는
그녀가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그녀가 주최 측에서 고용한 사진기사인 줄 알았다.
나중에 같은 회원이라는 말을 듣고 별나다고 생각했다.
친구가 나를 찍은 사진을 건넸을 때 무척 당황했다.
동갑이라는 것 외에 아는 것이 없는,
생면부지나 다름없는 사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진 속 내가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한껏 치장한 내게서 색과 장식이 빠져나간 그림자가 참, 공허했다.
그런데 겹겹이 두른 껍데기를 벗은 내가 홀가분해 보였다.
내 불구의 사고들이 친구의 렌즈에 고스란히 잡힐까 봐 명랑한 척하곤 한다.
그러나 친구는 내 안에 웅크린 이기심과 아집과 독선을 놓치지 않는다.
그녀의 렌즈를 통해 말갛게 드러난 상처가 생각보다 아파보이지 않는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니 치유가 가능할 것 같다.
나는 결코 친구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녀의 구속이 싫지 않다.
예쁘게 찍어 줘, 어려 보이게 해줘. 수없이 부탁을 해도
그녀는 무참하게 기대를 저버린다.
기미가 잔뜩 낀 얼굴을 복숭아 빛으로 밝혀주는 자비도,
자글거리는 눈가 주름을 펴주는 아량도,
작은 눈을 커 보이게 하는 덤 같은 보정 작업은 없다.
며칠씩 사라졌다가 나타나는 친구의 표정을 보면
출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걱정과 궁금증으로 안달이 난 내게 그녀는
사람과 풍경들 사이에서 건진 느낌표들을 부려놓는다.
사진 속엔 살아가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장터가 있다.
철새가 날갯짓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허리가 잘려나간 산등성이와 시들은
꽃 한 송이처럼 온전한 것이 아닌
자투리 풍경에서 끄집어내는 이야기가 있다.
나는 가슴이 먹먹한 시를 읽는다.
그녀는 렌즈를 밀고 당기며 한 편의 시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의 사진을 보고 울컥했던 감상을 시 속으로 빌려온다.
하지만 시상으로 전개하는 것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친구의 절제된 감정과 예민한 시선을 파악하지 못한 탓이다.
나는 한 장면 한 장면에 담긴
그녀의 사색과 고뇌를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
잘 나가던 사업이 부도나고 철저하게 빈털터리가 된 후에야
깨달았다는 그녀의 내면을 넘볼 수 없다.
그녀가 던진 허공의 여백을 읽을 수 없다.
나는 아직도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나는 친구를 질투한다.
아니, 세상과 소통하는 친구의 방식에 열광한다.
친구는 푸성귀를 파는 할머니와 노숙자의 신발을 바라보던 그 눈빛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갔을 것이다.
그들 옆에 앉아 가식과 격의가 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녀의 사진은 사람과 풍경을 향한 무한한 애정에서 출발한다.
사진기의 무게 때문에 한쪽으로 처진 친구의 어깨가 안쓰럽다.
그러나 결코 삶에 짓눌리지 않는 저 기울기는 그래서 당당하다.
이 가을, 친구와 함께 발길 닿는 대로 떠나고 싶다.
-선수필 2017년 겨울호
*오서윤(본명 오정순)
시흥문학상 수필 금상 , 철도 문학상 수필 우수상,
보훈문예상 수필 우수상, 이효석 백일장 수필 최우수
발길 닿년대로 떠날수있는 벗이 있다느것이 저무는 가을에 얼마나 아름다운 일일까요
좋은글 감사합니다